2: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2: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2: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본문의 대의와 묵상>
*5~9절 : 사랑을 나타내라
고린도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로 말미암아 권징(교회의 공적인 징계)을 받은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벌을 받은 것은 합당한 일이지만, 권징의 목적은 죄에서 돌이키고 회복하게 하기 위함이므로, 그들이 너무 많은 근심 가운데 잠기지 않도록 용서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나타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9~11절 : 용서의 이유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설립자이자 담임목회자로서 그들에 대하여 용서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바울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이유는 내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앎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당시 타락한 세상 문화의 영향을 받아 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죄를 지은 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를 분열하는 계파들이 있었고, 심각한 음행을 행한 자들이 있었고, 성도들간의 문제로 말미암아 세상 법정에서 소송전을 벌이는 자들이 있었고, 우상 숭배와 우상 제물로 말미암아 갈등이 있었고, 바울사도에 대하여 비방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성령의 은사 때문에 갈등이 있었고, 부활의 문제로 말미암아 논쟁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들은 교회를 끊임없이 혼란하게 했으며, 성도들을 주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비단 고린도교회의 문제만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도 이런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부끄러운 내용을 성경에 가감없이 기록하게 하신 것이죠.
이런 범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는 권징이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고, 죄의 유혹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당회의 결정으로 권징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합당한 권징이라 할지라도 겸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대부분 반발하거나 쉽게 교회를 떠나버리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와 당회는 권징을 시행함으로 벌을 주는 것보다는 미리 교육하고, 권면하고, 경계함으로 말미암아 범죄를 미리 방지하는데 더욱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가 죄를 범하였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교회는 가족과도 같습니다. 가족의 가장 기본적인 결속력은 혈연으로 이어진 사랑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 즉 한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보다 더 강력한 결속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이며,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해 교회의 본질이며, 가장 중요한 특성인 ‘사랑’을 나타낼 것을 권면합니다. 비록 범죄함으로 징계를 받는다 할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또 본을 보여주신 분명한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혹시 내가 교회 안에서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또 내가 교회 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내가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더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위로하고, 용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에’ 위로하고 용서하는 바울 사도의 마음, 즉, 우리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