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 시편 42:1~11
시편 42편은 비교적 잘 알려진 시편이지만 저자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저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시인은 지금 몹시 낙심하고 있고, 불안하여 떨고 있으며, 또 마음이 상해 있다는 것입니다. 5절과 11절에서 연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렇게 낙심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시인은 자기 눈앞에 있는 암담한 현실 때문에 낙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는 포로로 잡혀간 상태이거나 혹은 억류를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외롭게 살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시인을 향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며 빈정거리고 야유하고 있습니다.(3,10절) 시인은 그들을 향해 “나의 원수, 나의 대적”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지요.(9,10절) 그리고 현실적으로 볼 때 시인은 이런 환경을 벗어나 빨리 고국으로 돌아갈 소망이 별로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암담한 현실에 좀처럼 보이지 않는 소망,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따라서 자꾸 절망감이 밀려오고, 점점 더 불안해지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이유는, 암담한 현실 앞에서 너무나도 무능한 자기 자신의 모습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참 연약합니다. 따라서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누구나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하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더욱 마음이 내려앉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유는, 현재와 과거를 자꾸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현재와 과거에 자기가 처한 환경을 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행복했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지금 상황이 더욱 비참하게 느껴진 것이죠. 시인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나의 모습이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아마도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이렇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원래 사람이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은 다 비슷합니다. 그 뿌리가 똑같습니다. 암담한 현실, 무능한 자아, 그리고 예전과 비교해서 초라한 현재의 모습들... 이런 원인들로 인해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되고, 기를 못 쓰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만들까요? 우리를 넘어뜨리는 자, 우리를 낙심케 하는 자는 바로 사탄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참 가슴이 답답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많이 안정되었다고 하지만 전 세계가 팬데믹 가운데 있어서 언제 다시 질병이 유행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백신이 나와서 완전히 종식되기까지 적어도 1년 이상 걸린다는 소식에 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게다가 앞으로 더한 질병이 유행할 수도 있고, 환경 파괴와 지구 온난화로 인한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전처럼 언제라도 모여서 마음껏 찬양하고, 성도들과 마음껏 교제하고,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세상이 다시는 오기 힘들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은 점점 더 죄로 인해 악해져 갑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사나워져 갑니다. 가정들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가고, 깨어져 가고, 역기능 가정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돈 앞에서 무너져 갑니다. 공의와 정의가 권력 앞에서 무너져 갑니다.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더욱 큰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원하고 치료할 사명을 위임받은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사람을 살리고, 세우고, 고쳐야 할 교회는 오히려 교회 안의 갈등과 문제로 곪아갑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고 변화시켜야 할 교회는 거꾸로 세상을 부러워하고 점점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 교회는 점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세상의 논리가 지배하는 인간 조직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아직까지 그런 것 같지 않아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 제가 낙심하고, 불안해하고, 마음이 상한다고 해서 이상한가요? 낙심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요? 진정한 믿음은 낙심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좀 더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치고 낙심을 경험하지 아니한 사람이 있던가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불안해서 떨지 아니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믿음이 있어도 낙심합니다. 믿음이 있어도 불안에 떱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위대한 사람들도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때론 낙심하고, 때론 불안해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낙심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안 때문에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매어 달린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할수록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가 그랬습니다. 너무나 낙심이 되고 불안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명령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낙심이 올 때마다 하나님 찾고, 불안할 때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그것이 바로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1절에서는 참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팔레스타인은 건기가 되면 비가 잘 안 옵니다. 더욱이 남부 지역은 거의 사막이기 때문에 비가 안 오면 물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시인은 그렇게 가물 때 사슴 한 마리가 목이 너무나 말라서 물을 찾느라고 온 사방을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이 언덕 저 언덕 골짜기마다 다니면서 물을 찾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낙심될 때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떤 식으로 찾을까? 바로 저 사슴처럼 찾아야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슴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집요합니까? 얼마나 간절합니까? 물 아니면 죽음입니다. 물을 찾으면 사는 것이고, 물을 찾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절박합니까? 그러니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물을 찾을 때까지 그는 쉬지 않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을 찾을 때도 저렇게 찾아야 하겠구나” “낙심이 오고, 불안이 찾아오고, 마음이 상할 때면 저런 식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이 낙심과 불안을 벗어 버리고 일어설 수가 있겠구나.” 이것이 오늘 시편 저자의 깨달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자주 낙심을 합니다. 우리도 불안에 떨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도 마음이 상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하나님이 아니면 죽음입니다.”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갈급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말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애타는 마음, 갈급한 심정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에스겔 골짜기에 있던 마른 뼈들이 생명을 얻고 군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도 능히 회복시킬 줄로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며 두드리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기도의 주먹을 가지고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렸을 때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까? 눈물방울과 땀방울이 핏방울과 같이 떨어질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찾는 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가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함께 모여서 주님을 찾는 데는 관심이 적은 것을 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혹시 낙심 가운데 계십니까? 혹시 마음이 불안하십니까? 그래서 갈급한 마음으로 주를 찾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교회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